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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삶 남은 공부

4상(四相)에 대한 이해. - 견해에 갇히지 말아라.

by 행복살이 2022. 3.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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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편 링크를 또 해야 되는군요. ㅎㅎ
이야기의 연결은 아래 링크를 다녀오시면 연결이 되실 겁니다.
불교가 허무주의라고요? 누가 그래요?🥰(2)

불교가 허무주의라고요? 누가 그래요?🥰(2)

네. 이어서 계속 써봅니다. 앞편의 질문, 한번 생각은 해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불교가 허무주의라고요? 누가 그래요?🥰(1) 불교가 허무주의라고요? 누가 그래요?🥰(1) 오늘날 종교를 가지고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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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와서 말씀드리지만, 사실은 몇번을 지웠다가 썼다가 한 것들이 마음공부했던 내용들이었는데요.
참 이상하지요?
하겠다 할 때는 시작이 참 안되더니, 우연히 본 "오해"에서 덥석 시작해버리다니.
인연이란 이렇게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시작이 되나 봅니다. 😊


우선 상(相)이라 하는 용어부터 좀 설명을 드리고 시작할게요.
저도 처음에 보고서는, 서로 상(相) 자가 이런 뜻도 있었나? 했었거든요.
가뜩이나 낯설은데, 흔히 보던 뜻까지도 아니니 더 이해하기가 힘들었던 거지요.

바로 시작해보겠습니다.

불교용어로서의 상(相)이란?

경전이 중국으로 넘어오면서 번역의 과정에서 약간의 오류들이 생깁니다.
원래의 인도 산스크리트어로는 몇 가지의 단어들이 있던 것을, 상(相)이라는 공통된 단어로 묶어버린 셈이라.

samjna(sanna. 산즈냐, 산냐) -생각, 견해.
nimita(니미따) - 형상, 모습.
laksana(락샤나) - 어떤 대상의 고유한 형태. 그것만의 특별한 모습.

네. 이것을 번역할 때에, 그냥 뭉뚱그려서 상(相)이라 했다는군요.
큰 의미에서 차이가 없다고 당시에 판단한 것이겠지요.

"서로 마주하다"라는 의미에서 대상이 있음으로 인해 생기는 것들, 그런 포괄적인 의미로 상(相)이라는 글자를 적용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서로함이란 곧 분별이고, 이 분별에서 따라 나오게 되는 것들이라는 생각에서요.
(뭐, 제 생각입니다. ^^)


자, 그러면 이제 '네 가지의 모양(견해)'란 무엇인가로 넘어갑니다.

이 이야기는 유명한 "금강경"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전체적으로는 이 상의 작용이 곧 오온이라 보아도 무방한데요.
그 중에서 대표적으로 잘못 생각하는 관념들 네가지.(당시 인도 철학의 잘못된 주장들)
이정도로 우선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그런데, 이것도 또 한자로 번역이 되면서, 사람들이 오히려 무슨 말인지 모르게 되는 말이 돼버렸는데요.
제가 알아볼 당시에는 산스크리트어 원어로 해설해주신 분이 드물어서, 찾아보는 데만 꽤나 애먹었던 기억이 있네요.
분명히 뭔가가 어색했거든요.


결론 먼저~!!!(아, 웃프다.ㅋㅋ😂😂)


실컷 글을 작성해놓고 보니 말입니다...
결론에 이르기까지 낯설은 말들만 반복이 되니, 정작 거기까지는 반도 안 가겠다 싶어 결론 부분 먼저 올려놓습니다.
나머지는 그냥 상식의 차원에서 읽어보시기를 바랍니다.

<결론>
부처님께서 뜻하신 바는 단순한 그런 상(모양,견해)들에 대한 해석이 아니셨으리라 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러한 틀들에서 벗어나라는 뜻이셨겠지요.

흔히들 하는 말로, 달을 가리키면 달을 볼 일이지, 그 가리키는 손가락 가지고 난리들 피우는 것을 바라지 않으셨을 거라는 소리입니다.

『원래 아무런 제한도 걸림도 없는 대자유인 내가, 다른 무엇으로부터 제한을 받거나 혹은 스스로 제한을 하게만든 그놈들로부터 벗어나라는 것.』


이 이야기의 핵심은 그것입니다.
이제 나머지는 읽으셔도, 안읽으셔도 됩니다.

휴~~ 이제 좀 낫네. ㅎㅎ


1. 아상(我相).

네. 가장 알기 쉬운 상입니다. 동시에, 가장 깨기 어려운 모습이기도 합니다.
흔히 "나"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규정하는 것들이라 하면 될까요.

그냥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되는 것이고, 우리가 일상에서 자주 접하게 되는 말이기도 한데요.
흔히 자존심, 교만, 아집 등의 말과도 연결이 되니까요. (이러니까 바로 아시겠죠?)
"나"라고 하는 생각으로 인해서 즉, "나"를 규정하고 규정받으면서 생긴 허상이라 보시면 됩니다.

그런데, 이것은 당시의 힌두교 "Atman(아트만)"을 비판한 말씀이었다고도 합니다.
아트만이란 "영원불멸의 그 무엇" 쯤으로 이해하시면 되는데요.
힌두에서는 그런 의미에서 "브라흐만"이라는 신(세상)에서 유래한 나는 그와 같은 존재라 하는 범아일여(凡我一如)라는 설을 주장합니다.

문제는 아트만에 기반해서 윤회를 설명했기 때문에, 아트만(영원한 "나"라는 존재)이 계속 윤회한다고 보았던 것이지요.
즉, 내가 신도 되고, 개도 되고, 물고기도 되고, 사람도 되고.... 그동안의 아트만(나)은 계속 존재해 왔다 - 라는 설.

이 부분 따로 "윤회"에 대해서 올려보고 싶었는데, 여기서 나오네요.
부처님의 말씀을 쉽게 표현하면서 일단 간단하게 넘어갈게요.

고정불변의 어떤 무엇이 계속 윤회한다(새로운 몸에 깃든다.)는 것이 아니고, 쉽게 말해서, "새로이 만들어진다"는 개념으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다 부서지고 흩어졌다가(기존의 나는 없어졌다가), 새로이 만들어지고, 만들어졌으니 또다시 그에 맞춰 인식하는 해당 존재인 "나"가 되는 것이지요.
지금 내가 "나"라 인식하고 있는 것처럼요.
이 때의 탄생 기준이 업(業, karma)과 식(識)으로 인한 인과법과 인연법으로 그 존재가 된다 보시면 됩니다.

2. 인상(人相).

자, 이제부터 헷갈리기 시작합니다.
여기에서 인(人)은 영혼(ego soul)을 뜻한다 보시면 되는데요.
개별적인 "나"라는 존재가 있다고 보는 견해라 생각하시면 됩니다.

혹자는 윤회의 주체로서의 "뿌드갈라(Pudgala)"설 즉, 한때 불교 내에서도 하나의 부파가 주장했던 설을 말하는가 하면,
혹자는 자이나교에서의 "몸안에 갇힌 순수영혼"을 말하기도 합니다.

또, 혹자는 사람이라는 교만심을 말하기도 합니다.
사람이 최고의 존재이니, 다른 뭇짐승들이나 환경 따위 내가 좋으면 된다는 교만심요.
(그리 따지면 4차원의 존재에게 사람 따위는?? 너무나 간단한 풀이가 되니 생략.)

풀어보자면 이렇습니다.

부파불교의 독자부(일종의 종파입니다.)에서는 윤회의 주체로서 업, 식을 운반하는 짐꾼으로서의 존재. 그것을 뿌드갈라라 하고 이것이 윤회한다는 설. 개별적인 그 무엇(나)이 존재한다는 주장.

자이나교에서는 "자유로운 영혼이 몸 안에 갇혀 있으니, 그것을 해방해야 한다"는 주장, 즉 "몸이라는 물질에 내가 속박되어있다."라는 견해입니다.
그렇기에 고행을 하고, 그 고행을 이겨냄을 통해서 몸의 속박으로부터 영혼을 해탈시켜야 한다는 견해인 것이지요.

실제 우리가 어떤 고통이 있을 때, 그것보다 더한 고통이 있으면 오히려 그 앞의 고통을 잊게 되는 것처럼요.
속박하는 존재로서의 몸을 오히려 괴롭히는 고행을 통해, 그것에서 벗어나려 했던 주장이라 보시면 됩니다.

아트만과도 비슷하며, 중도의 이치와도 맞지않았다는 것은 부처님께서 몸소 알려주신 부분이니 큰 의미 없겠습니다.

이거 우리도 가끔씩 그러잖아요?
"아, 몸이 두 개면 좋겠다." 혹은 "이 몸이 없으면 훨씬 더 자유롭겠구먼." 이런 식의 푸념요. ㅎㅎ
그걸 진지하게 파고들었던 견해라 보시면 되지 않을까 합니다.

3. 중생상(衆生相)

사트와(sattwa) 산즈냐 - 이곳저곳 유전하는 존재라는 견해.
즉, 존재하는 모든 것들 중의 하나일 뿐으로 그저 이미 정해진대로(태어난대로) 살아갈 뿐이라는 견해.

전편에서 말씀드린 "운명론"이 이 견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뭐 특출 날 것 없이, 이 세상의 부속품으로 났다가 사라지는 존재.

오늘날에 보면 뉴에이지 철학이라는 것이 있다던데요.
잘 알지는 못하지만, "나는 우주의 먼지 조각에 불과하다"라는 설을 펼친다고 들었습니다.
뜻은, 앞에서 나온 인간의 교만심에 대한 반성으로 한 듯한데요.

역시 좁은 소견으로 보이시지요? 한쪽으로 치우친...^^
길가에 돌이나 나무나 나나 똑같다는 건 극단으로 간 것이지요?

이 또한, 인도말을 생각지 않았던 시기에는, "나는 중생이라 깨우칠 수 없다"라는 견해로도 알려졌습니다만.
역시나 간단한 비논리이니 생략합니다.

4. 수자상(壽者相)

jiva(지바) 산즈냐 - 생명이 있어 그 생명이 있을 때까지만 존재한다는 견해.
즉, 죽고 나면 아무것도 없다는 견해입니다.

어찌 보면 가장 와닿기 쉽지요? 그러나 또한 가장 위험한 생각이기도 합니다.

한번 살고 땡!이라는 생각이면 바로 치고 들어오는 것이 "탐욕"이고 "이기심"이고 "억울함"이니까요.
윤리, 도덕. 이른바, 양심.
그 따위 필요없잖아요. 한번 살고 죽으면 끝인데.

그것뿐인가요? 아무리 외면하려 해도, 끝내 몰려오는 "허무"는 또 어찌할까요?
자아(아상)이 강한 사람일수록, 이 두려움이 큽니다.
(아. 걱정하지 마세요. 한 번이 끝이 아니니까요.ㅎㅎ)

한번 보기에는 무언가 그럴 듯 하지만, 답이 안나오는 견해지요?
이 잘못된 견해로 스스로를 망친 이들이 한둘이 아니니, 정말 위험하고 어리석은 견해임은 분명합니다.

요즘 과학기술이 워낙 좋아서 사람의 사진을 찍으면, 몸에서 나오는 에너지가 비치는 사진도 찍는다면서요?
그렇다면, 과연 그 에너지 덩어리가 살아있을 때, 뿌리고 남긴 파장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저 말대로라면, 질량-에너지 보존의 법칙은 다 거짓말이 되는 거죠?

이게 예전에는 '오래 살고 싶은 욕심'으로 알려지기도 했다니...
번역은 그 때나 지금이나, 참 어려운 것인가 봅니다. 😊


일단 4상 자체에 대한 이야기로 잠깐 돌아갈게요.
금강경의 번역본에 따라서 네 가지가 아니라, 아주 세세하고 다양하게 번역해둔 책이 있다 하네요.
익히 알려진 구마라집 스님 본으로는 4상이지만, 현장 스님 본에서는 아주 다양한 상으로 표현해 두셨다고 합니다.

뭐, 우리가 그런 거 파헤치는 학자들도 아니니, 참고만 하시고요.
중요한 것은 그 손가락이 아니지요?

오늘 이야기를 가만히 살펴보면.

사람들의 머릿속은 그 시대나 지금이나 비슷해서, 지금도 세간에서 회자되고 있는 생각들이라는 것 눈치채셨을 거예요.
운명론, 허무주의, 절대성, 상대성....

아무런 수행도, 공부도 하지 않은 우리들도, 저런 생각이나 주장을 쉽게 할 수 있다는 것 말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그만큼 착각에 빠지기 쉽다는 것이 될 겁니다.

저 스스로를 돌아보아도, 저 네 가지의 생각을 다 해보았으니까요.

응?

해보신 분들 많지 싶은데요?

소주 한잔 놓고 젊은 한 때, 격정적인 토론도 하셨지 않나요?
지금도 세상이 궁금한 젊은 아이들은 여전히 저런 토론, 하지 싶은데...ㅎㅎ
일상에서 하고 겪는 내 생각들로 말입니다.

깊게 연구해 들어갔다는 뜻이 아니라,
이런 것은 아닌가? 저런 것은 아닌가? 하는 일상의 의문 혹은 주장으로서 말입니다.

이 말은 곧, 많은 사람들이 빠질 수 있는 함정이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저렇게 따로 표현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입니다.

앞편에서 말씀드린 "오온"에 의한 시각.....
마음이 열려 있는 분은 이제 하나씩 퍼즐들이 맞춰지는 것을 느끼는 분도 있을 거예요.

(마지막 결론은 앞으로 옮겼으니 여기까지 합니다. ㅎㅎ)

오늘도 행복한 하루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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